관리자 글쓰기


 

 

1.

 

 

 

 

 

또다시 우리는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끊어지지 않는 굴레를 향해.

 

비극으로 점철된 세상 속에서도 계속 살아갈 의미가 있을까. 레이첼 가드너는 의무적인 어조로 설명하는 직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세상은 무채색이 된 지 오래다. 무언가를 생각하다가도 금방 잊었다.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둘 수 없고 소유하던 것도 놓쳐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자신이 보는 세상을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레이첼은 자신이 소유한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거나 까맣고, 또는 회색빛을 지닌.

직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그녀를 인도했다. 레이첼 씨에게 배정된 상대는 안 쪽에 있습니다. 앞서 말한 주의 사항을 반드시 숙지해주시기를 바라며 문의 사항은 데스크로 와주세요.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멀어진다. 유난히 울림이 컸다. 레이첼은 눈을 내리깔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렇게나 뻗어 있는 다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턱을 괸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자는 눈을 치켜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인상, 나빠 보여. 그녀는 남자를 향해 의례적인 인사 한 마디조차 건네지 않았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흩트렸다.

 

이런 꼬맹이를 배정해주면 어쩌자는 거냐, 망할 놈들이.”

 

그녀는 남자와 마주 앉았다. 서늘한 침묵이 사이를 메웠다.

 

이래서 LS 놈들이 싫다니까.”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첼의 시선이 그의 행동을 따라간다. 마치 아기새처럼 따라오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는 짐을 챙기다말고 퉁명스레 말했다.

 

어이, 말해두지만 난 친절한 놈이 아니야. 살고 싶으면 알아서 찾아오던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고.”

 

“...지 않아.”

 

?”

 

그녀의 중얼거림에 남자가 반문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똑똑하고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목소리가 놀랍도록 크게 맺혔다.

 

살고 싶지 않아.”

 

감정 동기화 발병 이후, 환자들은 의무적으로 파트너를 정해야만 했다. 상대를 방치해두는 것도 살인죄에 적용되기 때문에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는 레이첼의 말에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럼 죽던가.”

 

죽여줘.”

 

당신이라면 할 수 있잖아. 그렇게 말하는 시선을 참으로 밥 맛 떨어지는 종류였다. 남자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그렇게 죽고 싶어서 안달 났으면 옥상에서 뛰어내리든가. 신속하게 저승으로 보내줄텐데, ? 남자의 말에 레이첼은 답했다.

 

들었어. 당신, 고의적으로 LS를 방치한다는 말을.”

 

그 말에 남자는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알만한 속셈이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상습범이다. 고의적으로 LS를 방치하여 신고가 들어온 것이 여러 번. 하지만 언제나 사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후 고문하듯이 자신의 감정을 나눠준다. 반복되는 고통에 얼마 가지 않아 파트너를 교체해달라는 요구가 들어온다. 법에 위촉되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다. 남자는 말없이 레이첼 앞으로 걸어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런 눈빛을 무엇이라 지칭하더라. 레이첼은 한참동안 그의 눈을 뚫어져라 마주했다.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 재미도, 흥미도 없다는 무가치한 시선. 그러나 그런 경멸스러운 시선에도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깨져 감정이 줄줄 새어나가는 것 같았다. 화를 내야 정상일까. 하지만 그것조차도 이제는 힘겹다. 남자는 괜스레 의자를 발로 걷어차고는 마음대로 하라며 소리친 후, 밖으로 나갔다.

 

이름, 물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찾아온 물음은 서늘한 그의 그림자를 따라 총총, 발자국을 내며 따라간다.

 

 

 

 

2.

 

 

사랑 받는 것도, 웃는 것도 모르는 세상이었습니다.

 

 

직원에게 받은 주소 적힌 종이 한 장, 그리고 물어물어 찾아간 동네는 이 지역에서도 가장 질 나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음산한 거리는 한 낮임에도 불고하고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태양이 더욱더 짙고 늪과 같은 그늘을 만들어내는 원흉 중 하나였다. 폐건물의 낡은 몸뚱이가 서서히 추락한다. 레이첼은 그늘의 틈새로 접어들며 겨울과 같은 냉기를 느꼈다. 물어볼만한 사람도, 표지판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디에 있을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무덤 같아. 한참을 걸어 올라간 끝에 레이첼은 조용히 내뱉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의 무덤. 간간히 창문 사이로 빛나는 눈망울이 보였으나 그 뿐이었다. 어디선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낮게 들리긴 했으나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이 장소에서 그녀는 유독 이질적인 존재였고, 또한 이들이 배척하는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시선은 느껴졌으나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침내 꼭대기. 낡고 허름한 집 한 채가 보였다. 군데군데 갈라지고 무너져내린 공간은 불완전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하지만 도리어 퇴색된 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난히 솟아오른 지붕 탓이었을까.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레이첼은 간신히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문을 두드렸다. 답은 없다. 그녀의 행동에 문은 서서히 밀려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안은 어두컴컴하다. 사람의 형체가 녹아 사라질 것처럼. 그녀는 겁 없이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아무도 없었다.

구식 텔레비전이 노이즈를 뿜어내며 흐릿하게 빛났고 낡은 소파에는 솜이 잔뜩 삐져나왔다. 널브러진 박스와 과자 봉지가 그녀의 발에 채였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사람다웠다.

노이즈가 섞인 구닥다리 텔레비전에서는 지겹도록 개그 프로를 방영했다. 무심한 시선에도 먼지가 쌓일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발소리가 들렸다. 거칠게 문이 열리고, 석양을 등진 채 잭이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집에 있는 의외의 인물을 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 .”

 

레이첼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직원에게 물어봤어. 당신의 집.”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쳐들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그의 등 뒤에 끌려온 물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시체였다. 엉망으로 난도질 당한. 말라붙은 핏덩이가 돌조각처럼 굳어 떨어졌다. 그 장면은 참으로 그로테스크했다. 붕대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들고 온 시체, 그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소녀. 그리고 바닥에 녹아내린 선명한 다홍색의 석양.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했다. 남자는 소녀의 죽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어이, . 죽고 싶다고 했나?”

 

레이첼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공기가 바싹바싹 말라가는 것 같았다. 그는 혀를 찼다.

 

, 이름이 뭐야.”

 

레이첼 가드너.”

 

소녀의 이름을 들은 남자는 말없이 시체를 구석에 던졌다. 레이첼은 멀어지는 그의 등을 쫓으며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남자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머리를 긁으며 퉁명스레 답했다.

 

아이작 포스터다.




*





계속 이어서 쓸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은 올려봅니다... 오랜만에 글쓰니까 어렵네요. 진도도 안나가고.

이 글은 퇴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고 부끄러워서 이불을 걷어찰지도.

2.의 첫문장은 불꽃의 동 가사 중 한 문장입니다.


그나저나 살천 온리전 터진 거 너무나 아쉽네요 부스 내려고 했는데...오랜만에 회지 내려고 했는데....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