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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의 천사 / 잭레이] 우연
2016. 8. 19. 11:22 - Elysee





 

 

 

 

 

오래전에 함께 듣던 노래가

거리에서 내게 우연히 들려온 것처럼

살아가다 한번쯤 우연히 만날 것 같아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

-스탠딩 에그, 오래된 노래

 

 

 

 

 

 

 

화창한 날씨다. 여름날의 뜨거운 햇볕이 부서질 듯 내려쬔다. 그늘 한 점 없는 광장에서 레이첼 가드너는 자신의 손에 들린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표면의 물기가 발끝으로 떨어지는 시원함, 미지근하게 튀어 오르는 호수.

 

그 기억으로부터 십 년이 지나갔다.

 

지난 십 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여전히 무미건조했고 서늘했으며 그녀는 혼자였다. 그저 숨을 쉬었기에 살았고 이것저것 아등바등해 온 탓인지, 어찌되었든 그녀는 살아 있었다. 지금 여기에.

그녀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선명하고 푸르게 빛나는 기억은 단 하나뿐이었다. 기억의 일부였던 그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이후부터, 세상은 다시 무채색이 되었다. 그녀는 건조한 눈빛으로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았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유모차 속의 아기도, 단란한 세 가족의 모습도 그녀의 눈을 물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시 만난다면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왜 자신을 죽이지 않았는지. 어째서 떠났는지.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어째서 계속 살아있었냐고 묻는다면 혹시 우연이라도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고, 그건 바로 당신이니까.

 

마침내 얼음이 다 녹았다.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 햇볕은 무자비하게 세상을 밝혔다. 눈부신 빛에 흐릿한 신기루가 피어오른다. 익숙한 뒷모습이. 아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건 한여름의 햇볕이 만들어낸 신기루일까?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레이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한동안 물끄러미 서로를 바라보았다. 십 년이라는 세월이 길다는 걸 체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여전히 키가 컸고, 더운 여름에도 붕대를 칭칭 감고 있어 시선이 사로잡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머쓱하게 얼굴을 긁적이다가,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레이.”

 

마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기억의 바다에 빠진 기분이었다. 작고 어렸던 그 때와.

 

오랜만이다?”

 

머쓱하게 건넨 첫마디가 겨우 그거였다. 레이첼은 짧게 미소 지었다.

 

어디 다녀왔어?”

 

, 그냥 여기저기.”

 

그는 시선을 돌렸다가 레이첼을 보며 씨익 웃었다. 장난감을 본 아이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나저나 너, 많이 컸다? 예전에는 요만한 꼬맹이더니.”

 

잭은 변한 게 없네.”

 

분명 묻고 싶은 말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단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진심을 꺼내기엔 이 시간이 평온하여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어제 봤던 사람처럼 그렇게 대하고 싶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고 싶었다. 자신이 궁금하지 않았는지, 보고싶지 않았는지, 혹은 후회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

 

어이, 레이.”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가를 툭툭 쳤다.

 

웃어봐.”

 

영화장면처럼 오버랩 되는 기억과 나이 먹지 않은 그의 모습. 레이첼은 비로소,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과 달랐다. 어렸던 그 때와는. 변한 것이 슬퍼해야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옛날처럼 그렇게 웃었다.

 

그래, 잘했어.”

 

그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성의 없는 손길이었지만 손은 제법 따뜻했다.

그 남자, 아이작 포스터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자신이 없는 것이 그녀의 인생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확인했기에. 우연히 마주친 건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이 세계에서.

 

우연답게 만남은 짧았다. 잭은 짤막하게 인사했다.

 

나 간다.”

 

레이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벌써?”

 

. 할 일도 있고.”

 

언제 다시 볼 수 있어?”

 

글쎄다. 워낙 바쁜 몸인지라.”

 

이내 이어지는 침묵.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십 년 동안 담아온 마음은 여전히 저 깊은 곳에 묻어둔 채로.

 

, 만날 수 있어?”

 

어이. 넌 이제 성인이고 혼자서 잘 지낼 수 있잖아. 뭘 어린애처럼 보채고 있어.”

 

만약, 다시 만난다면 그 때는-”

 

그녀는 말을 삼켰다. 그 때는, 그 때는 정말로. 입술을 꾹 다문 레이첼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잭은 몸을 돌렸다. 환상같던 신기루가 끝나고 하늘까지 치솟던 호수가 다시 바닥으로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한여름이 만들어낸 한 편의 짤막한 영화는 어떠한 결말도 내지 못한 채 잠잠해졌다. 그러나 레이첼은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과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다시 만난다면 그 때는 하지 못했던 말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될까. 그 때는 답변을 들을 수 있을까. 구름이 해를 가려 어둑한 그늘이 내렸다. 그녀는 잭이 갔던 방향과 반대로 발길을 돌렸다.

 




*



스탠딩 에그의 오래된 노래를 들으며 작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