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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퍼즈 / 릭벨져] 겨울바람
2016. 8. 11. 22:37 - Elysee

1.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 같았다. 소리를 잃은 건 어쩌면 나 자신이 아닐까. 휘황찬란한 거리와 화려하게 치장한 남녀는 팔짱을 끼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붉은 등불에 애처로운 하루살이들이 달려들었다. 벨져는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멈춰 섰다. 달갑지 않은 분첩 냄새가 역겨웠다. 얼굴을 찡그리며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지만 입 안에 남은 화장품 맛은 찝찝하게 남았다.

복잡한 거리에 멈춰 선 그가 거추장스럽기도 하련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를 피했다. 맹수를 알아본 가녀린 초식동물이 그러하듯 본능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은발, 망토로 가렸지만 고급스러운 옷가지. 그리고 매달려 있는 두 자루의 검. 누가 봐도 귀족이었다. 아무리 귀족이 몰락하고 있는 실정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오래 길들여진 자들은 귀족과 엮이고 싶지 않은 법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부딪치기 전까지 그는 거리에 장식된 모조품처럼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그와 부딪친 사내는 두 눈을 휘며 웃었다. 갈색 머리칼을 땋아 앞으로 모은, 요사스럽게 눈웃음을 짓는 남자였다.

 

저런, 실례했소.”

 

남자는 벨져의 어깨를 털어주며 말했다. 벨져는 오만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며 그의 손을 물리쳤다.

 

설마 그 무서운 검으로 날 내려칠 생각은 아니겠지.”

 

장난스러운 말투에는 가시가 박혀 있다. 벨져는 남자의 눈썰미가 썩 쓸만하다고 여겼다. 잠깐 사이에 자신이 무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라면. 남자는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태도였으나 목숨을 걸고 줄타기를 하는 광대 같은 느낌이 강했다. 웃는 눈에는 칼날이, 매끄럽게 올라간 입술은 날카롭다. 그는 벨져의 등을 치며 말했다.

 

사과의 의미로 한 턱 내고 싶은데, 어떻소?”

 

벨져는 선뜻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코 그의 호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남자의 뒷모습이 하늘하늘 흔들린다.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입담은 가히 재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훌륭했다. 벨져가 굳이 답하지 않더라도 제멋대로 대화를 이끌어갔고 그것은 대부분 시답잖은 잡담에 불과했다.

사내가 소개한 곳은 어느 허름한 술집이었다. 볼품없는 외관과 간판조차 달려 있지 않은 허술함이 벨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살피던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입구를 가리켰다. 들어가 보면 재미있을 거요. 호언장담하는 꼴이 볼 만 했다.

휘장을 걷고 들어서자 뜨거운 온도가 훅 끼쳐왔다. 열기를 견디지 못해 옷을 벗은 사내들이 열을 올리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과연. 미간을 찌푸린 벨져가 혀를 찼다. 겉보기에는 낡은 술집처럼 보이는 이 곳의 주 메뉴는 도박이다. 카드, 홀짝, 그 외 어떤 것도 상관없다. 도박을 벌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사내는 눈을 찡긋거렸다. 그대는 이런 곳에 익숙하지 않겠지. 남자는 능숙하게 벨져를 끌고 들어가더니 한 무리에 자리 잡았다. 기본적인 도박 게임으로 종이컵 안에 있는 주사위의 홀짝을 맞추는 것이다. 보답이라는 게 도박으로 말아먹게 해주겠다는 뜻이었나? 벨져의 말에 남자는 웃으며 답했다. 걱정 마시오. 이래봬도 도박은 자신 있거든. 호언장담한 대로 남자는 꽤 선전하는 듯싶었다. 벨져는 무심하게 종이컵이 섞이는 것을 보았다. 뻔하군. 그는 남자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오른쪽이 짝수.”

 

정답이었다. 그대도 꽤 하나보오? 남자의 말에 벨져는 코웃음을 쳤다. 요행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도, 그 다음 판에도 벨져는 정확하게 맞췄다. 얼빠진 표정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느려.

 

어디서 이런 요물을 데리고 온 거야?”

 

주사위를 굴리던 남자는 사내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샜다. 남자는 주사위를 던지며 자리를 떴다.

 

이런 것에 능통할 줄은 몰랐는데, 도련님.”

 

테이블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은 그가 벨져에게 말했다. 그리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었어. 엿 먹여보려던 수작이 이렇게 쉽게 무산될 줄은 몰랐다. 보통 잘나빠진 고상한 도련님들은 이런 수작에 쉽게 넘어가 옷까지 홀딱 벗겨져 쫓겨나곤 하는 게 관례였다. 너무 느리다라. 저런. 그 남자는 가장 빨리 주사위를 굴리는 자였는데 말이지. 사내는 고개를 까딱이며 두 개의 술잔을 가져왔다. 특별히 부탁한 것으로 효과는 기대할만 했다.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준 그대에게 건배.”

 

선한 목소리. 미묘하게 계산된 표정. 벨져는 그를 훑고는 순순히 잔을 받아들였다. 잔이 부딪치고 서로를 응시한 채 술을 마신다. 액체가 벨져의 입술에 닿는 순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잔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과열된 열기에 찬물을 끼얹듯 소리는 분명하게 주변을 경직 시켰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 명은 미소를, 또 다른 남자는 무감정한 얼굴을.

 

천박한 수작이군, 릭 톰슨.”

 

사내, 릭 톰슨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곳이 내가 사는 세상이오. 고상한 도련님에게는 자극이 심했나보군.”

 

릭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자신의 잔을 흔들었다. 까다롭기도 하지. 그의 절제된 시선이 자신을 훑을 때마다 묘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 그래. 처음 본 순간부터 말이지. 숨이 멎는 줄 알았지 뭐요. 마치 내가 발가벗고 있는 것처럼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시선이라니. 기분 나쁘잖아.

조금만 눈을 돌리면 마약에 취한 채 자신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제 몸을 갉아먹는 것도 모르고 시궁창에 얼굴을 처박는 꼴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퀴퀴한 땀 냄새와 은밀하게 죄어오는 파국을 향한 올가미가 한데 뒤섞여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쓰레기들이 모여 유곽은 유지 된다오. 놀랍지 않소? 저런 자들도 필요한 구석이 있다니. 릭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비명의 틈새로 벨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익숙해. 바닥에서부터 강제로 끌어올려진 기쁨이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토사물 위를 기어 다니고 다른 이의 머리를 술병으로 내리친다. 지옥과 다름없는 풍경 속에서 벨져는 되풀이해 말했다. 아주, 익숙하지.

릭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벨져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아무튼 잘 부탁하오, 앞으로.”

 

벨져는 인사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치 고양이 같은 시선으로 내려다보곤 인사도 없이 난장판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릭은 허전하게 빈 자신의 손을 머쓱하게 거둬들였다. 결코 좋지 않은 첫인상이었다.

 

 

 

 

 

 

  

 

 

2.

 

 

 

 

유곽에 머무르는 자는 대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 이 곳에 종속되어 몸과 웃음을 파는 기생. 그리고 그들을 구매하는 자가 두 번째. 릭은 전자였다. 그가 소속된 고급 요정 라크리모사는 고위급 유지들이 드나드는 특별한 곳이다. 그는 특출한 기생으로 재치 있는 입담과 형용할 수 없는 매력으로 사람을 홀리는 자였다. 또한 라크리모사는 고위급 정치인과 다수의 부르주아들의 비밀 회담 장소로 쓰이곤 했는데 그런 연유에서 라크리모사의 기생들은 나라를 뒤흔들 비밀 한 두 가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중 릭은 다수의 인물에게 총애를 받아 수많은 기밀의 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라크리모사는 비밀 유지가 필수였고 그들은 절대 유곽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탈출 시도는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목숨을 걸고 밖으로 나가려 했던 기생들이 시체로 돌아온 것을 수도 없이 봐왔다. 릭은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완벽한 복수를 꿈꿨다. 자신과 생을 위해서.

격변의 시대. 왕정은 몰락하는 중이다. 왕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그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던 귀족들 또한 단두대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왕은 누구도 지킬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목은 건재했다. 아직은 혁명의 불길이 당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의 수족이 잘려나갈 동안 이름뿐인 왕좌에 앉아 절규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귀족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시민을 대표한다는 표제를 내걸은 정치인들과 세월의 흐름에 편승한 부르주아였다. 귀족들을 차례차례 단두대로 내보낸 것도 그들이었다.

대대로 왕실을 섬기던 홀든 가의 선대 가주는 거미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열하고 잔인한 수를 택했다. 자신이 앞장 서 귀족의 죄를 밀고하여 그들을 사지로 집어넣은 것이다. 동료든 친인척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살아남겠다는 의지 하나로 증오어린 경악과 저주 속에서 칼날을 집어삼켰다. 그들은 살아남았다. 목적도 명분도 잃은 채로.

그러나 현 가주인 다이무스 홀든의 생각은 달랐다. 이대로 가문의 존속만을 유지한다면 영원히 그들의 뒤꽁무니를 쫓아야했다. 눈치를 보고 동태를 삼키며 사냥꾼에서 사냥감이 되어가는 과정을 견디기만 해야 한다. 그런 방식은 숨조차 쉴 수 없다. 자신의 목이 언제 달아날지 모른다. 단순한 유지만으로는 가문의 이름을 지킬 수 없다. 그는 저울질을 시작했다. 어떤 방식이건 홀든은 우위에 서야 했다. 홀든은 결코 평온하게 안주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과거 선조가 그랬듯이 타인의 희생과 넘쳐흐르는 피 위에 꽂인 검만이 그들을 말해주었다.

그는 전쟁을 결심했고 그들을 몰락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단언컨대 정보력이었다. 그가 후보로 꼽은 건 정치인들의 회담 장소였던 라크리모사의 기생들이었다. 개중에는 필시 정보를 거래하는 자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뜻밖에 다이무스에게 먼저 접근한 기생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릭 톰슨이었다. 다이무스도 그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다소 섬뜩한 느낌이 들어 보류해두고 있던 참이었다. 그것은 여느 기생이 품은 독과는 차원이 다른, 더 이상 뭉칠 수 없을 때까지 응축되어 버린 증오였다. 그것을 향기로운 꽃잎에 감싸고 상대를 유혹하는 꼴이라니. 그와 엮인다면 마지막이 좋게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앞으로 입수될 것들이 다른 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임을 알기에 그는 릭 톰슨이라는 이름의 독을 품기로 마음먹었다. 그 대신 안전장치는 필요했다. 마침 릭의 요구와 들어맞았기에 그의 감시역이자 안전을 책임 질 사람인 벨져 홀든이 그의 곁을 온종일 함께하기로 예정되었다.

그것이 릭 톰슨과 벨져 홀든이 만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3.

 

 

 

라크리모사는 고급 요정다운 위용을 지니고 있었는데 첫 째로 넓은 부지와 그에 걸맞은 웅장한 건물, 두 번째로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호수와 정자가 그것이었다. 밤이 되면 호수에 제 몸의 상흔을 담그는 달을 감상할 수 있었고 저 멀리 들려오는 기생의 구슬픈 노랫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생각하기 좋을 만큼의 소음이 존재하는 곳이라 릭은 자주 찾곤 했다. 호수의 표면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때마다 기생인 릭 톰슨이 아닌 온전한 릭 톰슨의 모습을 보곤 한다. 과거의 자취를 더듬는 자신을 볼 때마다 이따금 욕지기가 나오기도 했다.

정자에서 릭은 언제나 혼자였으나 이제는 달랐다. 벨져는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좋은 상대였다. 그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도 좋았고 벨져 역시 침묵을 즐기는 쪽이었다. 적에게 등을 내맡긴 꼴이었으나 릭으로서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고요라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기분을 만끽한 것은 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그 때도 시린 달빛 같은 단단한 소년과 함께였다. 안개에 가려진 소년의 얼굴과 목소리는 제아무리 추억의 문을 두드려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릭의 마음속은 무덤이었기에 앞으로 가질 수 없는 추억만이 처량한 묘비와 함께 묻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공허하나 들리지 않는 절규는 메아리처럼 한 쪽 가슴을 치고 되돌아오곤 했다. 상념은 좋지 않다. 정자에 앉아 호숫가에 다리를 늘어트린 릭은 소년처럼 물장구를 치며 말했다.

 

나와 그대가 연인이라는 소문이 났더군.”

 

정적이 집어삼킨 웃음은 금세 땅으로 꺼져버렸다. 벨져는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찼다.

 

할 일도 없는 모양이지. 그런 소문이나 옮기고 다니니.”

 

매정하긴. 차라리 소문이 낫지 않소? 훌륭한 위장전술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홀든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대들도 곤혹스러워지겠지. 한낱 기생과 말이야. 릭은 젖은 발걸음으로 벨져에게 다가갔다. 단단한 얼굴을 한 채 정자세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가 몇 있었다. 제아무리 아리따운 기생이 붙어도 꿈쩍하지 않던 남자들. 그런 자들을 짓이기는 건 황홀한 쾌락이었다. 수컷의 냄새를 갈무리하고 무색무취의 향으로 감추려던 것을 릭은 기어코 끌어내곤 했다.

검을 품에 간직한 채 앉아 있던 사내는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는 물기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릭은 그를 내려다보며 깎아진 대리석 같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슨 짓이냐고 묻는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아도 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진심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오.”

 

턱 선을 타고 간지럽게 내려가던 손길은 어느새 목젖을 지나 가슴께를 스치고 있었다. 그러나 벨져는 무감각하게 지켜보았다. 느슨하게 풀어헤친 옷매무새와 드러난 가슴팍이 제 팔에 닿아도 사내는 검집으로 상대의 턱을 가볍게 치며 경고의 의미를 보낼 뿐이었다.

 

그대를 사랑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흔히 기생에게서 볼 수 있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릭이 말했다. 숨결이 와 닿았다. 갈색 머리칼이 벨져의 뺨을 간질였다. 맞닿은 이마가 축축하다. 릭의 손이 제멋대로 벨져의 몸 위를 방황하기 시작하자 벨져는 릭의 손을 잡으며 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더러운 짓거리는 그만 두는 게 좋겠군.”

 

경멸은 익숙했다. 아름다웠던 세월조차 타인의 경멸과 농락으로 물들어 잊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릭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셔츠를 풀어헤칠 듯 단추를 만지작거리다 추락하는 꽃잎마냥 제 입술을 그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벨져의 검집이 릭의 턱에 닿았다. 고요한 눈동자가 떨어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오?”

 

물기 어린 처연한 목소리가 단지 연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끊어진 실처럼 릭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릭은 몸을 돌리며 다시금 벨져와 거리를 두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원한다면 상대에게 기꺼이 몸을 주어야하는 사내라오. 그들은 내 몸 이곳저곳을 농락하고 주물러대며 내 비명을 만끽하지. 아침이 되면 꿈을 꾼 것 같아. 남아 있는 상흔만 아니라면 질 나쁜 악몽을 꾸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텐데.”

 

모든 소리가 먹혀버린 밤이었다. 구슬픈 기생의 노랫소리도 슬픔에 잠식당한 듯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림자에 가려진 릭의 얼굴이 매섭게 웃고 있었다.

 

벨져. 사랑을 해본 적이 있소?”

 

감정은 사치일 뿐이지. 그의 말에 릭은 감탄과 조롱을 한데 섞어 빈정거렸다. 그것 참 고상한 이유로군. 정말로 고지식한 귀족이 할 법한 말이야.

 

나는 있었지. 아주, 오래된 일이오.”

 

그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밤에 취해버렸어. 어쩌면 미쳐버린 걸지도 모르지. 미치지 않고서야 이 삶을 끝까지 붙잡고 있을 자신이 없으니까. 릭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힘없는 행위는 이내 날개 잃은 나비처럼 추락했다.

 

아주 옛날이라 기억도 잘 나지 않소. 그 감촉만이 선명하게 남아 나를 괴롭히지.”

 

그런데 말이야. 릭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벨져를 뚫어지게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를 보면 옛 기억이 떠올라.”

 

술잔에 맺힌 이슬이 불투명한 유리알이 되어 굴러 떨어진다. 어디선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릭은 무언가를 말할 듯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끝내 말은 나오지 않았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을 다잡으며 비밀을 삼켰다.

 

달이 차오.”

 

그 말을 끝으로 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무감각한 날이었다. 미세한 감각이 벨져의 손끝에서 툭, 터졌다. 세차게 요동치는 파문처럼 흔들리는 뒷모습을 본다. 그는 하늘하늘, 춤추듯이 정자 주변을 맴돌았다. 옛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나. 벨져는 릭이 기울이던 술잔에 술을 따랐다. 하지만 넌 자유롭지 않나. 찬 술잔에서 새어나오는 시린 공기가 손을 얼어붙게 했다. 릭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웃긴 이야기라도 들은 마냥 뒤틀린 얼굴로 반문했다.

 

지금 자유롭다고 했소?”

 

나를 조롱하는 것이오? 그는 어느새 성큼성큼 다가와 두 눈을 부릅뜬 채 벨져를 노려보았다. 난간을 붙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대 후려갈기고 싶다는 양. 손등에 솟은 핏줄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려면 백 마디의 말로도 부족했다. 더군다나 벨져는 그리 말을 길게 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상대에게는 과거에서 묻어온 자유의 향기가 버젓이 존재했다. 시간을 거슬러 온 것처럼.

 

이게 자유롭다고? 한낱 미물도 제 마음가는대로 움직일 수 있거늘, 관상용 꽃에 불과한 내게 자유를 말해?”

 

릭의 역정은 무던히 흩어졌다. 그는 처연하게 웃었다.

 

그래, 당신과 나의 세상이 다르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소.”

 

귀족 도련님의 어리광을 받아줄 여유 따윈 없으니 다른 사람이나 찾아보시오. 여긴 당신의 어리광을 달래줄 사람들이 차고 넘치니까. 물론, 돈이 있다면 말이지. 벨져 홀든의 사심을 사야한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아니,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는 아름다웠으며 눈부셨기에 자신의 세상이 천박하고 더럽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으니까. 눈 돌릴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적나라하게 오물을 비췄다. , 그래. 좋은 것만 보고 멋진 옷을 입고, 자신의 가치를 낮출 일도 없으며 명예로 치장한 채 고운 처녀의 손을 잡고 춤을 추었겠지. 그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원치 않은 이에게 몸을 보이고 그의 비위를 맞춰주며 갖은 희롱을 견뎌내는 수치심을. 그렇게 해서라도 이뤄내야 할 것을.

벨져는 악의서린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릭을 향해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행의 무게는 동일하다. 그의 불행과 자신의 불행 중 어떤 것이 무거울 지는 누구도 정할 수 없다. 그러니 입 아프게 말을 한 들 의미는 없으리라. 그의 상황을 구태여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진 정보. 계약 이외의 감정은 사치에 불과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초침소리가 들렸다. 소리와 함께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간다.

 

 

 

 

 

4.

 

 

 

 

 

 

 

그믐달이 뜨는 밤은 땅 위에 존재하는 더러운 속삭임마저 감춰버려 진실로 둔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밀회를 행하기에 훌륭한 날임은 그것을 행하는 자도, 그들의 꽁무니를 쫓는 사냥개에게도 쉬이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유곽을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유곽 내의 감시는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음모를 야기하거나 뒤가 구린 자들이 흔히 이곳을 찾는 이유도 그런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릭은 창가에 걸터앉아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기묘한 곡조는 소란스러운 밤에 묻히는 듯했다. 여인을 유혹하듯 끈질기게 이어지던 휘파람 소리에 마침내 답가가 들려왔다. 이어지는 곡조에 술 취한 한량이 부는 것 같은 유쾌함이 스몄다. 소리가 툭툭 튀어 올라 귓가를 따갑게 한다.

 

연습을 하긴 하는 거요?”

 

알아들을 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쾌활한 목소리는 짐짓 껄렁하게 들렸다. 어둠에 가려진 얼굴에서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건 날카로운 턱선 뿐이다. 남자는 자신의 신분을 가리려는 듯 로브를 치렁치렁 둘렀지만 단단한 팔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이따금 들리는 절그럭거리는 소리 또한 그가 무장을 한 상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릭은 익숙한 듯 상대의 신원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차림새가 눈에 띈다는 건 몇 번 언급했소만.”

 

신경 꺼, 아저씨.”

격식 없는 말투에 릭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시답잖은 잡담이 몇 번 오가고 난 후 상대는 비로소 용건을 꺼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만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내였다. 인사치례로 시비를 걸고서야 본론으로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이번 소득은?”

 

말하는 폼이 자릿세 받으러 온 한량인지라 퍽 불량했다. 남자가 벽에 기대앉자 릭은 버릇처럼 주변을 살폈다. 낌새를 눈치 챈 남자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무도 없어. 내가 다 확인했으니까.”

 

릭은 던지듯 서류 봉투를 떨어트렸다. 남자는 솜씨 좋게 받아 뜯어보더니 몇 장 읽고는 세찬 휘파람을 불었다. 맑고 높은 소리가 만족을 나타냈다. 여하튼 제멋대로다. 간부에게 전달되기 전까지 내용을 확인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을 텐데. 남자는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하는 버릇이 있었고 위에서도 그것을 충분히 감안해 주었다. 순전히 그가 특별한 위치에 존재하는 사람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남자는 영리하게 제 위치를 이용할 줄 알았다. 그의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언뜻 보였다 반짝이는 눈빛에 가려진다. 천진난만한 눈웃음이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안다. 릭은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윗대가리들이 좋아하겠는데?”

 

당신들은 움직일 필요 없소.”

 

혁명의 횃불을 당기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손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비열하게 살아남은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 목숨을 구걸하고 몸을 팔면서도 얻으려고 했던 가치를. 이제는 잃어버린 그 이름을. 릭이 침묵을 고수했지만 남자는 짐작 간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별 수 없이 일어섰다. 릭이 그러하듯 사내 또한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협력관계는 이익에 따라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는 얄팍한 종이의 단면과 같기에. 남자는 떠나기 전 턱짓으로 문을 가리키며 슬며시 웃었다.

 

저런, 손님이 온 모양인데?”

 

릭이 몸을 떨며 일어서는 순간 남자는 바람 같이 사라졌다. 남은 잔향이 나뭇가지를 뒤흔든다. 그는 방을 가로지르며 한 면에 걸려 있는 전신거울을 스치듯 지나쳤다. 얼핏 보인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문을 열자 서늘한 단면이 보인다. 소리와 함께 반사적으로 돌아간 시선이 열린 입술과 함께 추궁한다.

 

누구지?”

 

무슨 말이오?”

 

천연덕스레 잡아떼는 릭의 몸짓에 거짓은 없었다. 진실로 결백한 사람처럼 순진한 얼굴을 지어 보이자 벨져는 역겨움을 감추듯 얼굴을 찡그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저런, 애인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아까의 사내가 굴었던 모양새를 그대로 따라하며 릭은 그를 지나쳤다. 소리 없는 발걸음이 달그림자를 따라 흔들렸다. 하지만 벨져는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너에 대해 그 무엇도 알지 못한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은 좋았다. 거기까지는 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이무스의 방식에 대해서도 토 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릭과 마주한 순간 벨져는 의식 저 편에 가려져 있던 누군가의 그림자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부터 시작해 행동, 손짓, 눈빛, 마지막으로 모습까지 잃어버린 텅 빈 껍데기가. 이상하게도 그 소년과 릭은 눈곱만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드문드문 발견하는 작은 눈짓에서 찾아오는 데자뷰가 그의 의식에 파문을 만들었다. 기억의 편린은 명확한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벨져는 자신이 허공을 걷고 있다고 느꼈다. 존재하지 않는 실체를 지키고 있다고. 그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이미 사라진 시체의 무덤 속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 초침소리가 들렸다. 전보다 느린.

 

나는 일개 기생일 뿐이오.”

 

자신이 말해놓고도 신빙성 없이 느껴진 릭은 애써 만들어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일개 기생이 귀족의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나? 웃기는군.”

 

신랄한 말투와 함께 벨져는 성큼 그에게 다가섰다.

 

일개 기생은 스파이 노릇을 하지 않는다. 박쥐처럼 양 쪽을 저울질 하지도 않지.”

 

그건 당신이 몰라서 하는 소리요.”

 

릭은 싸늘하게 웃으며 자신의 셔츠를 뜯었다. 가슴팍에 얼룩덜룩한 무늬가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옅은 흰빛이었다. 그것은 낙인이었다. 애완동물에게 목줄을 달 듯 자신의 것이라 새겨놓은 천박한 혓바닥이었다. 릭은 무엇이 그리 우스운 지 씨근덕거리는 잇새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대와 얘기하면 할수록 내가 초라해져.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절대로 쓰러질 것 같지 않은 영웅 같았다.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까발릴수록 그는 점차 작아졌다. 당신의 빛이 불쾌해. 결코 가질 수 없는, 내게 허용되지 않은. 하지만 우습게도 가지고 싶어 안달 난 나는 자꾸만 그대에게 손을 뻗게 되지.

 

그대들은 이런 고귀한 놀이를 즐기는 모양이더군.”

 

요사스러운 달빛을 온 몸에 받으며 릭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천천히 낙인을 따라 그렸다.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게요? 그리 묻는 눈빛은 닳고 닳은 시선이라 퇴폐적으로 보였다.

상대를 비웃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각자 살아온 삶의 방식이 달랐으며 짊어진 것도 다른 마당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어떤 말을 한 들 그에게는 조롱으로 들리리라. 벨져는 아주 잠시 동안, 달빛이 호숫가에서 릭의 발치로 향하는 잠깐 사이 자신의 어깨에 드리워져 있는 가문의 그림자가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이것 또한 살아남기 위한 방도에 불과하다. 그와 자신은 동일선상에 있다. 자신의 몸과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기생과 가문의 가치를 내 건 채 존속을 저울질하는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다시 초침소리. 시계가 움직인다. 그는 망연히 들리는 시계소리에 맞춰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를 지우려 애썼다. 그것은 그에게 붙어 있는 망령이었다. 홀든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늪이다. 현기증이 났다. 벨져는 이마에 손을 댄 채 벽에 기댔다. 창백한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간신히 손에 쥐고 있던 회중시계가 추락한다. 출렁, 수면 아래로 처박혔다.

벨져? 릭은 그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회중시계가 굴러간다. 그는 벨져를 잡으며 낯익은 회중시계에 시선을 두었다. 세월이 지나도 선명히 음각된 문양에는 바랜 흔적이 여실히 남았다. 릭은 두 눈을 크게 뜨며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벨져는 릭을 밀어내고는 회중시계를 집어 품에 갈무리 했다. 식은땀으로 점철된 창백한 얼굴이 잔잔하다. 흔들림 없는 고요한 눈빛이 되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예나지금이나 칼이 서린 전쟁터에 올곧게 서 있을 사내였다. 과거의 소년과 겹쳐 보이는 이유는 저 눈빛과 의지가 맞닿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설마 그럴 리 없다고 릭은 부정했다.

 

배신은 용서치 않는다, 릭 톰슨.”

 

서리 내린 얼굴이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마냥 냉혹했다. 올곧게 앞을 보는 시선이 가시처럼 찔러온다. 릭은 소년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낮은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 때도 지금처럼 소년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푸른 달빛에 목을 맨 밤하늘 아래서 서릿발처럼 차게 내리치던 시선을 기억했다. 매섭게 몰아치던 칼바람, 이따금 슬픔을 내비치던 푸른 바다가 빛바랜 추억과 함께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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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른 온리전에 나왔던 회지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