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글쓰기
'NOVEL'에 해당되는 글 47건
  1. [전독시 / 중혁독자] 2019.07.31
[전독시 / 중혁독자]
2019. 7. 31. 08:44 - Elysee




장마

전지적 독자 시점 2차 창작

유중혁 X 김독자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소란스러웠다. 가시지 않는 두통과 함께 눈을 뜬 유중혁은 잠결에 울리던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빗소리가 거세다. 유중혁은 번잡한 시야를 똑바로 잡으려 애쓰며 다시금 메시지의 문구를 확인했다. 누군가의 부고 소식. 자다 깬 탓일까. 꿈속의 내용처럼 몽롱했다. 생각을 이어가는 게 쉽지 않은 것은 충격 때문일까, 아니면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탓일까. 금이 간 미간은 펴질 기색이 없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후에야 그는 간신히 문자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이 비단 현실감 있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약을 먹은 것처럼 새하얗게 비워진 머릿속에서는 검은색 정장을 세탁소에 맡기진 않았겠지, 오늘 스케줄이 뭐였더라 같은 시답잖은 일들만 토해내었다.

그는 간신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정장은 제대로 옷장에 박혀있고 무리 없이 미룰 수 있는 스케줄만 남았다. 지금 출발한다면 오늘을 넘기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크게 처리해야 할 일도 없고 당장 급한 일도 없다. 별 것 아닌 생각이 부유하는 이유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마음의 준비를 했었는지도. 그런 생각이 충격을 상쇄해주지는 않았다. 손가락이 새하얗게 변질되도록 침대 모퉁이를 붙잡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잠시 잊고 있었던 목소리가 장난처럼 뒤따라왔다. 중혁아, 너 머리 까치집 됐다. 추억은 어째서 끈질기게 달라붙는지. 그 말을 했던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떠났음에도, 끈질기게 남아 잊을 만하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추억을, 낡고 오래 묵혀둔 이야기들을. 유중혁은 간신히 뜨거운 덩어리를 삼켰다. 멍청한 놈. 잇새로 나온 말은 슬픔 대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영정 사진을 마주 보지 못했다. 곁눈질로 본 사진 속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적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하긴, 이제와서 생각해봐야 늦었다. 이미 그의 얼굴을 본 몇몇이 수군거리는 작태를 보면서 들어왔는데. 유중혁은 느리게 봉투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부조금을 건넸다.

도망치듯이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건물 한쪽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헤어졌으면 보란 듯이 잘 살기라도 하든가. 이별을 말한 놈이 죽어서 돌아왔다. 생전에 소식 한번 못 듣다가 어째서 부고 소식은 늦지 않게 자신에게 전달되었는지. 마치 보란 듯이 죽은 것 같았다. 비가 와서일까. 눅눅해진 옷이 질척하게 달라붙는다. 설상가상으로 라이터에도 불이 붙지 않았다. 유중혁은 결국 벽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빗물이 그의 얼굴에 달라붙어 흘러내렸다. 크레파스로 삐뚤게 그린 눈물 모양처럼 어지러이 쏟아졌다. 헤어지자고 말한 것도 김독자였고, 죽은 것도 김독자였다. 그가 없는 세상은 사실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건 단순히 함께 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전히 유중혁은 김독자가 남겨놓은 환상 속에 갇혀 살았다. 잠에서 깨어 일어날 때, 자동차에 탔을 때, 집 근처를 거닐 때. 숨 쉬듯이 그와 함께했던 기억이 재생된다. 상상 속에서 김독자는 쫑알거리며 말을 늘어놓고 유중혁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몇 번 던지듯이 대답해주는 그런 광경들을. 김독자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이야기를 할지도 유중혁은 완벽하게 꿰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없어도 김독자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쉽게 짐작이 되었다. 그것이 환상이라고, 상상 속의 웃기지도 않은 환영이란 걸 자각하고 나면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미 떠난 사람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어 봐야 어찌할 도리도 없는데. 함께 한 시간은 이별에 잘려 나갔고 우리를 떠난 세계는 영원히 다시 만날 일이 없었다. 머리는 알고 있지만 미련을 쉽게 놓지 못했다.

이별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조금만 더 눈여겨볼 걸 그랬나. 이상하리만치 캐물어 볼 걸 그랬을까. 그랬다면 내 곁을 떠나지도 않고, 내 품에서 힘겹게 이야기를 꺼내 봤을까. 그날 왜 그랬는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어째서 갑자기 그랬는지. 수많은 의문은 잠식될 길이 없었고 답을 줄 사람도 영원히 떠났다.

유중혁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바닥에 버렸다. 아직도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김독자와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났다. 자신에게 부고 소식이 멀쩡하게 왔다는 건 그의 휴대폰에 여전히 자신의 연락처가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결국 김독자는 또다시 혼자 끌어안고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손도 닿지 않는 곳에.

가장 가까운 사이였지만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우리는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헤어졌던 그 날처럼 제대로 된 인사도,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먼 길을 떠났다. 짐을 나누어 가지지 않으려는 기질은 자신이나 김독자나 비슷했다. 너무 믿었던 탓이다. 그의 거짓말까지 믿어버린 탓에.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아직도 김독자의 흔적은 남아있는데.

유중혁은 김독자와 헤어지고 난 후에도 같이 살던 집을 처분하지 못했다. 집 안의 모든 것은 여전히 이 인용이었다. 두 개의 칫솔, 두 개의 슬리퍼, 두 개의 베개, 두 개의 머그잔. 유중혁은 여전히 침대 한 쪽을 비워놓고 잤다. 각기 다른 시각으로 맞춰진 알람을 제때 껐다. 습관적으로 수저를 두 벌 놓으려다가 멈칫거린다. 퇴근하고 올 때면 다녀왔다고 인사하고 집 안을 둘러본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그런데 이제는 영원히 잃어버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기대했다. 희망을 품었다. 실낱같은 희망 고문 일지라도, 그래도 누군가는 희망을 믿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희망을 믿게 한 사람은 김독자였다. 그가 유중혁에게 희망을 가르쳤고 유중혁은 난생처음으로 희망을 가졌다. 김독자가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부숴버린 사람 역시 김독자였다. 그는 최초의자 마지막이었다. 유중혁의 희망의 증거를 부숴버린.

유중혁은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상념 속에 불쑥 튀어나오는 김독자의 목을 조르고 그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려 애썼다. 그런 행위를 거듭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은 그를 죽일 듯이 조여왔다. 기억은 거듭될수록 퇴색된다는데. 빗소리에 파묻혀버렸으면 좋겠다. 이건 장송곡이다. 장마가 끝나면 너에 대한 기억도 지워질 것이다. 빗물에 선명하게 번지는 기억은 금방이라도 현실이 될 것처럼 생생했다.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은 왜이리 아름다운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장마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억이 물속에 번져 흘러내려 갈 때까지, 쉬지 않고 비가 내렸으면 했다. 그리하여 너에 대한 기억이 모조리 지워지도록. 결국 추억도 너처럼 내 곁을 떠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