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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의 천사 / 잭레이] 무제
2016. 6. 8. 01:23 - Elysee





 *요네즈 켄시 vivi 기반




너와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감정 따위는 알지도 못했겠지. 아는 것이 독이라더니, 지금 내가 그 꼴이다. 너는 죽음을 갈구했다. 나는 너를 죽여줄 단 하나의 존재였고, 그렇게 일그러져간다. 멈추는 방법 같은 건 몰라. 이미 재가 되어버린 내일을 붙잡을 수도 없지. 하루하루가 새로웠고, 다시는 오지 않을 내일이 되었다.

 

레이.”

 

우리는 끝을 등진 채 서 있다. 너는 아래가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끄트머리에서도 떨지 않았다. 줄곧 이 순간을 기다려왔겠지. 몇 번이고 원했겠지. 살고 싶지 않은 너를 살려두는 방법은 내가 너무 멍청해서 모르겠더라. 너는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은밀하게 즐겼던 그 미소를 띤 채. 저 눈을 보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바다가 떠오른다. 사진으로만 접했던 그 곳이.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짙은 푸른색을 보인다고, 네가 말했었다. 너는 나의 새로운 세계였고 내일이었다. 하지만 너는 내일을 포기했다. 오늘을 그만둔 지도 오래되었겠지.

 

.”

 

그 날이 왔어. 드디어, 죽을 수 있어. 너는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너를 만난 이후, 그렇게 행복했던 모습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았다.

 

정말이냐?”

 

후회하지 않겠냐?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아아, 알고 있어. 너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겠지. 나는 독에 제법 내성이 있는데 네가 내게 퍼트린 독은 치료할 방법이 없더라. 무슨 말이건 하고 싶었지만, 그만두라고 갖은 핑계를 대고 싶지만.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싫어해. 그러니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로 변모해버릴 것 같아서.

 

, 있잖아.”

 

잠시간의 침묵 끝에 너는 웃었다.

 

사랑하고 있어.”

 

내일이 되면 작별인사를 해야겠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있어. 아마 계속 그럴 거야.

 

잭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쓰지 못했어. 어떤 아름다운 것도 쓸 수 없었어.”

 

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얗고 얇은 손가락이 햇빛에 창백하게 빛났다. 흘러내린 빛이 너의 다리를 스쳐지나간다. 바닥을 훑고, 이내 내게 도달했다. 해가 진다. 너는 오늘 죽을 예정이다.

 

내일이 되면 오늘의 우리는 죽어버리고 없겠지.”

 

그러니 죽은 오늘에 너를 두고 갈게, . 너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마치 날아갈 것처럼. 신부가 내게 헛소리를 한 적이 있지. 너는 투명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레이, 날개를 가지고 있는 건 아무래도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다.

 

사멸하는 빛이 너를 갈랐다.

 

 

 

*

 

 

네가 없는 오늘은 조용했다. 줄곧 혼자였는데 고작 네 녀석과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예전에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릴없이 공책을 들여다본다. 네가 가르쳐주었던 것들, 이제는 제법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너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잊으라고. 바보냐, .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었으면 진작 버렸지.

 

이상하게 짜증이 난다. 네가 남긴 물건을 뒤적거린다. 네가 언제나 가지고 다녔던 재봉도구, 내가 줬던 나이프, 낡은 책들. 그리고, 잔뜩 구겨진 채 내팽개친 편지. 온통 지웠다 쓴 흔적이 가득했다. 너는 단 한 문장만을 남겼다. 누굴 바보로 보는 거냐. 이 정도는 이제 읽을 수 있어. 더듬거리며 읽어 내려간 문장은 간결했다.

 

이별만이 우리의 사랑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줄곧 삼켜왔던 말이 있다. 낯간지러워서 몇 번이고 혀끝에서 맴돌다가 이내 잘라 내버린 말이. 나는 편지를 구겼다가 다시 폈다. 찢어버릴까 생각했으나 아무렇게나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계속 뒤를 따라오고 있었던 말. 바뀌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말들. 만약 말했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래도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너는 한동안 끈질기게 따라붙을 것 같다. 내가 죽여 버렸던 그 누구보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냐. 말해봐, 레이. 넌 한 마디만 하면 돼. 계속 살아가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