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글쓰기
[사이퍼즈 / 데샹바레] Doomsday
2017. 1. 8. 00:17 - Elysee

 

 

 

*쌍충 배포전 벨라 모르테에 나왔던 데샹바레 회지 전체 웹공개 합니다.

 

 

 

 

 

 

 

1.

 

 

 

 

 

 

 

 

 

00.

 

 

 

검은 옷의 신부는 경건하게 무릎을 꿇은 채 낮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외웠다. 작게 달싹이는 입과 굳게 맞물린 손은 신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남자의 긴 속눈썹은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아멘. 남자의 하얀 눈꺼풀에 붉은 방울이 맺힌다. 그것은 눈물처럼 뺨 위로 흐느꼈다. 신부의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형형하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가 뱀의 혓바닥처럼 늘어진 몸뚱이를 휘감는다.

거대한 십자가에 맺힌 건 신이 아닌 한낱 죽은 인간의 육신이었다. 그는 섬세하게 깎인 조각 같은 손가락으로 푸른 시신을 쓸어내렸다. 신이시여. 어린 양을 구원하소서. 신부는 자신의 손가락을 핥으며 달콤하게 속삭인다. 이미 당신의 곁으로 간 어린 양을 어루만지소서. 저는 오늘도 당신의 육신을 탐합니다.

 

 

 

01.

 

 

연쇄 살인마가 도시의 하이에나가 되어 설치고 다닌 지 꼭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네 번째 희생자가 나타났다. 경찰과 피해자의 부모가 발을 동동 구르며 부디 무사하길 바란지 일주일이 지난날이기도 했다. 차마 보여줄 수 없어 끝내 자식의 마지막 얼굴조차 보지 못한 어미는 비 오는 날 구슬프게 울었다. 울새처럼 발간 멍이 들 정도로.

이제까지의 사건 전부 피해자가 발견된 장소는 우습게도 성당이었다. 신이 굽어보는 장소에서 보란 듯이 불유쾌한 전시를 벌인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너나 할 것 없이 까무러치게 만들었다.

첫 목격자인 신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떠는 목소리였다. 곱상한 선을 가진 신부의 하얀 머리칼이 낙엽처럼 흔들렸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늦게까지 고해성사실에 있었다고 밝혔다. 그가 늦게까지 고해성사실에 머문다는 것은 여타 다른 신부들도 증명한 바가 있다. 그러니 별달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을 하고는 다시 한 번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남자의 가슴께에 흔들리는 은빛 십자가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신부는 눈을 감았다. 의중 모를 표정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그림자가 바람에 너울거린다. 그는 비틀거리며 길게 놓인 의자 사이를 헤맸다. 사건 현장에서, 형사들에게서 멀어질수록 바람결에 휘날리는 촛불처럼 흔들리던 그림자가 바로 섰다. 어깨를 펴고 겁먹은 듯 굽었던 등을 세운다. 노랗게 둘러쳐진 테이프 앞에 섰을 때 신부의 입가에는 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조롱하듯 속삭였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02.

 

 

 

신부의 긴 옷자락에는 신의 그림자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을 경청해야할 신도는 구겨진 담요처럼 널브러진 채 미동 없이 잠들었다. 신부는 자장가를 부르듯 가만가만 속삭였다. 당신은 구원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부디 영광스럽게 느끼시길. 까미유 데샹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막을 걷고 골목에서 나왔다. 그는 벗어두었던 선글라스를 끼며 가죽장갑을 몇 번 털었다. 붉은 물방울이 바닥에 점점이 찍혔다. 밋밋한 회색빛 아스팔트에 붉은 꽃이 피어오른다. 그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나른한 손짓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실오라기 같은 연기가 하늘로 흩어진다.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느긋하게 눈을 감고 미동하지 않았다. 남자의 발걸음은 고양이와 닮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고양이가 유연하게 담을 넘듯 가벼웠다. 남자는 그늘진 구석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어깨 위로 주홍색 불빛이 미끄러져 내렸다. 남자가 모자를 벗자 유난히 눈에 튀는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흰 달빛에 부서지는 기도를 보았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그의 구두를 적시는 피웅덩이와 살인의 찌꺼기로 남은 쾌락의 잔향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기도하는 신자의 모습이었다.

 

마음에 듭니까?”

 

낮은 웃음소리에 남자는 단박에 인상을 찌푸렸다.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등을 돌린 그는 골목을 나오자마자 까미유의 멱살을 잡았다.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내가 한 살인은 총 두 번이었다.”

 

이게 네 번째가 될 겁니다.”

 

맹수의 눈동자처럼 맹렬하게 발광하는 눈동자가 남자를 향했다. 남자, 히카르도 바레타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야차다.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말겠다는 음습한 의지를 가진 채 팽팽히 맞선다. 영역을 침범 당한 자는 자신의 자존심과 오만을 위해서라도 침입자를 죽여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감히 자신의 영역에 흙탕물 묻은 발을 비빈 죗값을 치러야하는 것이다.

 

동족상잔이란 말을 알고 있나?”

 

물론.”

 

그럼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잘 알겠군.”

 

히카르도는 까미유의 목을 가볍게 조르며 작게 속삭였다.

 

널 죽일 거다.”

 

이것 참 우연이군요.”

 

까미유는 히카르도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그의 손등에 푸른 핏줄이 나무뿌리처럼 솟아올랐다.

 

나도 마찬가지인데.”

 

 

 

 

03.

 

 

 

까미유는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끔찍했던 지난 기억을 떠올리는 지 몸을 떨었다. 그의 목은 낙인이 찍힌 것처럼 울긋불긋한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쓰게 웃자 증언을 듣던 형사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가로등이 고장 나 있었기에 범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습니다. 확인한 사실은 그가 남자라는 것, 키는 저보다 조금 더 크며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까미유는 잠긴 목소리로 침착하게 진술을 이어갔다. 수사본부 측에서는 아주 중요한 단서였다. 형사는 보라색 눈동자라고 적힌 부분에 밑줄을 긋고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까미유를 바라보았지만 까미유는 괜찮다는 듯 웃어보였다.

형사는 그에게 쾌유를 빈다는 말을 전하며 고개를 숙여보이곤 병실을 나갔다. 그가 나간 후 까미유의 창백한 입술은 천에 물감에 물들 듯 서서히 생기를 찾아갔다. 유려한 선이 휘며 유쾌한 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먹구름에 젖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에 비친 그의 모습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히카르도 바레타는 침대에 앉아 신문을 넘기며 혀를 찼다. 혼자 쓸쓸히 떠들고 있는 텔레비전 속 뉴스 앵커도 연신 긴급 속보를 터트렸다. 인터넷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구겨 던졌다. 어제의 눈동자를 떠올린다. 광기에 번들거리던 유리알을. 지독한 폭염과 갈증에 타들어가면서도 끝끝내 굴복하지 않는 고상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불쾌한 쓴맛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한 솜씨다. 모방범이라 하기에 오싹할 정도로. 그것은 전부 히카르도의 소행으로 단정 지어졌다. 그렇게 기록된 사건이 오늘까지 네 번. 실체는 드러내지 않은 채 그를 미끼로 삼아 자신도 놀아보겠다는 심보인지,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자가 쉽게 자신의 목적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히카르도는 인상착의가 적힌 기사를 소리 내어 읽었다. 남자, 190cm 추정, 보라색 눈동자.

 

게임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까미유는 허공에 네모난 칸을 그리며 말했다. 사람을 체스 말 정도로 취급하는 말투는 못내 매력적으로 들렸다. 히카르도는 자신의 발밑에 깔린 거미줄을 느꼈다. 그것은 물러서면 설수록 발목을 옭아맸다. 불쾌하면서도 달았다. 신 맛이 퍼졌다. 오만한 남자는 승리를 확신하며 눈을 가린다. 오랜만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 누가 먼저 체크메이트를 할 것인가?

 

 

* * *

 

 

카페 외부에 위치한 테라스는 대화하기에 썩 좋은 장소는 아니다. 거리의 소음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들어오기 때문에 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게다가 가게 내부에는 시끄러운 팝송이 왱왱 댄다. 하지만 무언가를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히카르도는 손 신호를 따라 낯선 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딜 봐도 평범한 인상의 남자는 뇌리에 남지 못할 정도로 특출한 구석이 없었다. 뒤돌아서면 금방 잊을 것 같은 인상 속에 유일하게 봐줄만한 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는 히카르도가 앉자마자 시답잖은 안부를 물었다. 히카르도 역시 어깨를 으쓱이며 누구나 답할 정도의 평범한 대답을 건넸다. 커피가 착잡하게 식어갈 때까지 본론은 내밀지 않은 채 말꼬리를 빙빙 돌리던 남자는 이윽고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서류 하나를 테이블 위로 밀었다. 히카르도는 펜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특이사항 란에 밑줄을 그었다.

 

이건?”

 

할 일없이 멀거니 허공만 보던 남자는 히카르도의 말에 퍼뜩 서류를 넘겨다보았다.

 

, 그거요. , 있잖습니까. 시신에 심장만 발견되지 않았다는 엽기 사건 말입니다.”

 

히카르도가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유일한 생존자라고 하더랍니다.”

 

심장 없는 괴물이라고 불리던 범인은 숱한 루머를 남기고 붙잡혔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소년을 죽이지 못한 채. 몇 십 년 전의 일이다. 당시 피해자들은 자잘한 범죄 경력이 있었기에 철없는 히어로 놀이일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나왔다. 뜻밖에도 범인은 그들과 비슷한 선상에 놓여 있는 남자였다.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종래에 정신병 판단을 받았다. 과연 우연일까? 그는 담배 필터를 짓씹었다.

 

 

 

 

 

 

 

04.

 

 

 

 

 

신부님.”

 

좁고 어두운 고해성사실은 마치 굴 같았다. 개미가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도 확성기에 댄 것처럼 왱왱 울렸다. 까미유는 구태여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허공을 향해 답했다.

 

.”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매님께서 찾던 인물을 발견했습니다.”

 

건너편의 여성은 말이 없다. 신부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 , . 불안한 듯 다리를 떨며 여자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모이를 쪼아 먹는 새처럼 천장을 보았다 바닥을 보기를 반복한다. 정신없는 행각이었지만 정작 여자는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느라 어지러운 줄도 몰랐다. 마침내 여인은 입을 열었다.

 

신부님. 저는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자식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까?”

 

까미유는 답하지 않았다. 여자 또한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더는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은 자매님께서 하시기에 달렸습니다. 당신은 그를 죽일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신부의 질문에 그녀는 억눌린 목소리로 답했다.

 

.”

 

그녀는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까지 줄곧 악몽에 시달려 왔다. 죽은 언니가 꿈에서 흘러나와 매일 밤 그를 죽여달라 애원했다. 그녀의 두 눈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눈물로 화한 적의였다. 그녀는 동생의 몸을 짓누르며 자신의 눈물을 마시게 했다.

여자는 몇 시간이고 언니의 분노와 증오를 마셨다. 식도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쓰지만 차가웠고 동시에 얼어붙었으나 재가 되었다. 역겨워 구토를 하고 싶었지만 언니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언니의 죽음이 슬퍼서 복수를 하는 것인지, 그녀가 자신의 꿈에 상주하는 것이 괴로워 복수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야. 날 위한 것이 아니야. 언니를 위한거야. 내가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언니의 삶을 위해서.

 

당신에게 신의 축복을. 신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을 때 그녀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이러니하네요. 살인을 위해 신의 축복을 건네는 신부라니. 그녀의 바람 빠진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별말씀을.”

 

체스의 졸은 언뜻 보면 쓸모없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승리의 초석이 만들어진다. 말은 쓰기 나름이죠. 까미유는 속마음을 숨기며 성호를 그었다.

 

 

상대는 메리 호프라는 여자입니다.”

 

까미유가 제안한 게임은 간단했다. 자신이 의뢰한 인물을 죽여 달라는 것. 청부 살인업을 겸하고 있기에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신부가 살인을 일삼는 것도 모자라 의뢰라니. 사내는 신부라기에 악마의 꼬리처럼 우아했으며 인간을 제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았다. 고저가 없는 목소리는 안부를 묻듯이 담담한 파문을 일으킨다.

 

당신이 죽인 피해자의 동생이죠. 현재 제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죽인 사람을 전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히카르도는 감성적인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는 턱을 치켜들며 감흥 없는 눈길을 보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 새삼스러운 클리셰에 감탄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악당이 사라지기를 원한다. 이것이 한 편의 영화라면 분명 안타고니스트 (antagonist)는 자신이다. 어린아이의 논리와 비슷했다. 히어로 영화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 위험한 점이라면 그는 그것을 충분히 실현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사람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히카르도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지키지 못할 것이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05.

 

 

 

하얀 기둥들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아치형으로 이루어진 천장은 신을 보좌하는 열둘의 천사 상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투박하고 거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하늘에서 굽어보았다.

히카르도의 발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소리가 그를 찌르는 것처럼 저 멀리 사라졌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그는 정면에 걸린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경호하듯 놓인 신상이 벽화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불편한 기색으로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당 한 가운데는 유난히 진한 빛기둥이 내려오고 있었다. 세상의 빛이란 빛은 다 긁어모은 것처럼. 동그란 자국 위로 그의 검은 구두가 불청객처럼 들어온다. 그는 그 위에 올라서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는 그의 몸을 충만히 적셨다. 그와 동시에 장전 음이 들렸다. 그의 뒤통수에 바짝 와 닿은 총구는 미세하게 떨렸다. 한동안 눈앞에 아롱진 푸른 멍들이 떠돌아 다녔다. 히카르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랬어?”

 

참으로 상투적인 물음이었다. 열이면 열, 전부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왜 이유를 갈구하는 걸까. 설마 복수 같은 진부하더라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댄다면 용서해줄 것처럼. 모든 행위에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착각이자 오만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인간의 목을 힘껏 조이며 숨이 넘어가는 모습을 본 적도 없는 자가 과연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까? 힘차게 뛰던 맥박이 자신의 손아귀 안에서 사그라지는 것을, 희번뜩거리는 눈이 빛을 잃고 사라질 때, 길게 뺀 혀가 돌처럼 굳는 순간을 보지 않은 자가 저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까? 어쩌면 목을 조르는 것보다는 쉬울 지도 모르지.

상대는 분명 의뢰 대상인 메리 호프일 것이다. 이 장면은 까미유가 만들어낸 조잡한 연출일 것이 분명하고. 여자는 사람을 죽여본 적은커녕 총을 만져본 적조차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틈을 봐서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지. 뒤통수에 구멍 뚫리는 건 사양이거든.

 

대답해!!”

 

여자의 목소리는 깨어진 유리조각 같았다. 울퉁불퉁한 단면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처럼 찢어지는 문장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여자의 숨소리만 거칠게 들렸다.

히카르도는 전에도 이러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의 대답은 같았다. 그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총구를 자신의 심장께로 가져갔다. 당황한 그녀가 순간 몸을 빼려 했지만 히카르도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긴 덕에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숨소리마저 닿을 정도였다. 그녀는 천적에게 잡힌 새처럼 일순 버둥거렸다. 방아쇠에는 손가락이 걸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히카르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넌 스테이크를 먹을 때 죄책감을 느끼나?”

 

그녀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것과 비슷한거지.”

 

선을 넘을 용기가 이 여자에게는 없다. 증오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밖에 없다.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일이다. 설령 그가 경찰에 잡혀 감옥살이를 한다 하더라도 여자의 증오는 식지 않으리라. 그는 총신을 더 강하게 당겼다.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저 상대가 필요했겠지. 슬프지 않아도 슬픈 시늉 정도는 해줘야 할테니.”

 

 

아니야, 나는...!!”

 

히카르도는 그녀의 목을 쥐었다. 새처럼 가냘프다. 눈물이 차오른 얼굴로 고개를 든 메리와 히카르도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빨려 들어갈수록 끝이 보이지 않았다. 출구가 없는 심연처럼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건 그녀의 삶과 전혀 다른 세계를 본 자의 눈이었다. 점점 목이 졸려왔지만 그녀는 이렇다 할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풀리지 않는 손아귀를 손톱으로 긁으며 발버둥을 쳤다. 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앞이 흐려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개처럼 흐려진 세상에서 마지막 잔상으로 남은 건 죽음처럼 다가온 보랏빛이었다. 번진 물감처럼 퍼져가던 잔상은 이내 눈부신 흰빛에 갈라졌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체취는 독특한 체향을 내며 떨어졌다. 그녀는 짐짝을 내팽개치듯 의자 구석에 떨어졌다. 히카르도는 손목을 만지며 얼굴을 구겼다. 길게 찢어진 상처가 피를 토해냈다.

까미유는 햇빛을 등 진 채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일으켰다. 메리의 다리는 아직도 아기 새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까미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유치한 이야기에 감탄을 보내듯 박수를 쳤다. 둔탁한 소리가 쿵, , 울렸다. 그러나 현실에 해피엔딩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는 그녀가 떨어트린 총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은 어느새 까미유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아아, 저 얼굴을 저 여자가 봐야하는건데. 자애로운 신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희열과 쾌락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손으로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등을 쓸어내리고 있지만 히카르도에게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움직이면 재미없을 겁니다.

 

만족하나?”

 

히카르도의 물음에 까미유는 두 눈을 휘며 웃었다.

 

메리 호프 씨. 제가 당신을 구원해주겠다는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불시에 터진 파열음은 그녀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녀의 몸뚱이는 날지 못하는 새가 추락하듯 볼품없이 떨어졌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입을 막고 웃는 그는 말했다. 안녕히. 그녀의 두 눈은 감기지 못했다. 그녀의 언니가 그랬듯이, 자신을 죽인 살인자를 향해 못박혔다. 까미유는 그녀의 눈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말했다.

 

안타깝군요. 당신의 복수를 위해 훌륭한 무대를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감히 누군가를 구원한다며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빛. 히카르도는 그제야 까미유에게서 느끼던 이상야릇한 불쾌감의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비단 동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타인을 구원할 수 있다는 오만함. 단지 그것을 위해 살인을 한다는 목적. 까미유는 지문을 닦은 후 흉기를 그녀의 옆에 던졌다.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악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죠.”

 

요컨대 필요악이라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저는 당신의 죄를 가중시키고. 히카르도가 저지른 살인은 두 번. 거기에 까미유가 모방범 노릇을 해 가중시킨 건이 두 번. 도합이 네 번이다. 그의 살인은 자신의 연극을 위한 연출에 불과했다. 그는 교묘하게 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영광의 관을 차지하는 것은 까미유 데샹, 자신이 되리라.

 

경찰에 연락했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살인범은 멍청하군요. 지금 경찰들은 당신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거든요.”

 

까미유는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카운트다운 시작입니다.”

 

그의 말과 함께 아득히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06.

 

 

 

 

네온사인조차 추방당한 더러운 뒷골목. 인간임을 망각한 자들이 최후로 닿는 에덴동산이었다. 퇴폐적인 우울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세상과 격리된 이면. 미로처럼 엉켜 있는 길은 추적을 막아주는데 용이했다. 그 속에서 까미유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는 왕처럼 앉아 히카르도를 내려다보았다.

 

열여덟이었나. 심장 없는 괴물 사건에 휘말렸다고 들었다.”

 

뒷조사도 한 모양이군요.”

 

둔탁한 박수가 조롱하듯이 울렸다. 히카르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유일한 생존자였고.”

 

그렇습니다만, 문제라도?”

 

어떻게 살아나왔지?”

 

궁금하십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범인이 나거든.”

 

그는 빈 깡통을 걷어찼다. 요란한 소음이 골목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죄목은 다양했습니다. 작은 거라도 상관없었죠. 전 피해자들을 구원한 겁니다. 맞지 않습니까? 저로 인해 그들은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개소리군.”

 

히카르도가 깔끔하게 일축하자 까미유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그의 손가락이 피아노를 연주하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툭툭, 벽은 제각기 음색을 내며 울렸다. 그는 전에 없이 매서운 표정으로 권총 한 정을 던졌다. 실린더에 총 여섯 발이 들어가는 모델이었다.

 

러시안 룰렛을 알고 있나?”

 

물론.”

 

까미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누가 먼저 뒈지는 지 기도라도 해볼까?”

 

둘은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텅 빈 동굴처럼 낡은 침묵만이 권총을 두들겼다. 긴장된 적막이 축축한 손을 타고 흐른다. 둘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행동은 히카르도가 먼저였다. 경험이라고 한다면 그가 훨씬 우위였다. 그는 까미유를 덮치며 그의 위를 타고 올랐다. 움직이지 못하게 목을 잡은 다음 그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역시 덜커덩, 하고 마른 소리만 났을 뿐이다. 까미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

 

그 말과 함께 무릎으로 히카르도를 걷어찼다. 그가 손으로 방어하며 물러나는 순간 다리로 그의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그와 함께 반동으로 몸을 일으키며 개머리판으로 그를 후려쳤다. 히카르도는 아슬아슬하게 막아내며 그의 얼굴을 잡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숨이 틀어 막힌 듯한 신음소리가 터졌다. 손가락 틈새로 히카르도의 보라색 눈동자가 횃불처럼 타올랐다. 까미유는 그의 팔에 손톱자국을 내며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맞아도 좋고, 아니라도 좋았다. 히카르도는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까미유는 흔들리는 골에 얼굴을 찌푸리며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히카르도의 목소리가 울렸다.

 

, .”

 

타격이 컸다. 역시 프로는 다른가. 일대일 싸움이 불리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차이가 날 줄이야. 그는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았다. 격투도 한 수 위다. 실전에서 굴러본 자답게 감도 좋았다. 차라리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싸웠더라면 유리했을 지도 모른다. 안일한 오만함이 폐부를 찌른다. 히카르도는 까미유가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타입은 잠시 틈을 주면 금세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둔다.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주어진 총알은 한 발. 정확하게 공격할 타이밍을 잡고 쏴야 한다. 그래봤자 러시안 룰렛이라는 것은 운이었다. 누가 행운의 여신의 손을 잡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둘은 진흙탕처럼 구르며 서로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애썼다. 싸움에 고상한 방법이란 있을 수 없고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기회를 단 한 번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설사 잭팟을 터트리더라도 그것이 빗나간다면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다섯.

 

힘에서 밀리자 까미유는 되려 그의 방아쇠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고 당겨버렸다. 히카르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반대쪽 손을 발로 밟았다. 까미유의 몸이 들썩이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지만 끝끝내 일그러지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히카르도였다.

 

나는 어쭙잖은 영웅 심리로 설치는 놈이 가장 싫다. 그런 의미에서 네 녀석은 최악이지.”

 

히카르도 바레타.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피해자들은 성당에서 죽었다. 그들은 신자가 아니었으나 의레 그렇듯 위기에 처한 순간이면 이 순간을 타파해줄 위대한 존재가 떠오르는 법이었다. 그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커질수록 그의 광기는 커져 갔다. 까미유는 발악하듯 비웃으며 말했다.

 

피해자들을 죄다 무릎 꿇려 놓고 말했겠지.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는 신에게 살려 달라 애원해보라고! 하지만 신은 널 구원해주지 않아. 당신은 신이든 영웅이든, 그러한 신화적 존재를 매우 혐오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끝까지 입만 살아서는.”

 

누군가를 구원해주는 것이 나쁠 리 없잖아?”

 

나는 신의 대리자라고. 그 말에 몸을 일으키려는 까미유의 어깨를 짓밟으며 히카르도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건 인형놀이에 불과해.”

 

심장 없는 괴물 사건. 웃기게도 그것은 한 소년의 잘 짜인 각본에 불과했다. 그가 자신의 입으로 그랬듯이,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는 그러한 가상의 존재를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까미유 데샹은 열여덟에서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상의 빌런을 만들어 내었다. 말하자면 이 도시 전체가 그가 쓴 연극이었던 것이다. 입이 쓰다. 결국은 놀아난 것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최종장의 마침표는 이제 한걸음 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랬지. 널 죽여 버리고 싶다고. 젠장맞을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해줘서 고맙군.”

 

긴장에 젖은 숨결이 축축하게 날아든다. 둘은 서로를 껴안을 듯이 마주한 채 상대의 이마에 총구를 겨눴다.

 

최후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07.

 

 

도시를 공포에 빠트린 연쇄 살인마가 검거되었다. 며칠 동안 신문 1면을 장식하며 시민들을 안심시켜주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신고자의 전화를 받고 범인을 추적했지만 그 끝에 남은 건 사망했을 정도로 추정되는 다량의 혈흔이었다. 시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찰은 의구심을 늦출 수 없었으나 수사 끝에 이러한 상처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수사를 종료했다. 또한 범인과 혈투를 벌인 것은 일개 시민이라도 불릴 만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수사 협력을 하고 있던 프로 파일러로써 살인마와의 혈투 끝에 기절한 상태로 발견 되었다. 그는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묘한 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창백한 얼굴로 사건이 해결되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남기곤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어느 겨울, 눈이 내리는 거리. 검은 우산으로 온전히 눈을 막아내며 얼어붙은 도시를 찬찬히 걸어갔다. 사방은 대리석 조각처럼 매끈해졌으며 종종 우스꽝스럽게 미끄러지는 사람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유난히 평범한 사람들 틈에 끼여 있던 또 다른 남자는 얇은 복장임에도 불구하고 춥지 않은 듯 양 어깨를 단단히 펴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성당의 종소리가 그들을 파묻을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2.

 

 

 

 

 

 

 

가시 돋친 장미가 아름답듯이 그리워 마지않는 존재들은 칼날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움에 눈이 머는 순간 상대를 찌를 수 있도록. 그러니 헤어 나오지 못한다. 애처롭게 기어가는 순간에도 찰나의 환각에 눈이 멀어 닿지도 않는 것에 미련을 가지고 있으니.

그의 이름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회한과 미련이 뒤섞여 그의 이름을 자아낸다. 내뱉는 숨결마저도 전부 그에 대한 후회로 가득 찼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까미유는 입술을 뜯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저 망연히, 한없이 털어낼 뿐.

히카르도 바레타는 죽었다. 이후 까미유는 히카르도의 모습을 담은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냈다. 그의 얼굴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단 한순간도 잊지 못했음을 여실히 느꼈다. 자료를 참고하지 않아도 그는 살아생전 히카르도의 모습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세세한 설정까지 전부.

그러나 까미유는 히카르도를 완성하고 난 후 그를 외면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히카르도 바레타가 사망한 사실을 끊임없이 번복했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 순간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꿈속에서조차 그의 입모양을 되새긴다. ‘이제 만족하나?’ 이제야 떠올리려 안간힘을 쓰는 것조차 무색하다. 그것이 정녕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최후의 문장이었는지도.

 

히카르도는 이 곳이 그의 세계 전부였다. 하지만 자신의 세계 속에서 그의 존재는 없었다. 오로지 히카르도 바레타라는 인물만이 남았다. 까미유가 자리를 비우자 히카르도는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그의 의자에 앉았다. 미약한 온기가 차가운 몸체를 관통한다. 그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그를 상상한다. 창문을 넘실거리며 타고 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것을 못 이겨 넘어가는 책장. 낮게 펄럭이는 커튼과 그의 긴 속눈썹. 활자를 훑는 그의 시선. 섬세하게 뻗은 손가락은 펜을 쥐고 무언가를 기록한다. 자신은 알지도, 알 수도 없는 세상을.

히카르도는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가 유일하게 쓰지 않는 서랍이었다. 오랫동안 열지 않은 듯 듣기 싫은 마찰음과 함께 먼지가 풀썩 날렸다. 퀴퀴한 곰팡내가 그득한 장소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건 낡은 사진 한 장 뿐. 낙엽처럼 바스라질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래된 사진인지는 그 안의 인물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차분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하얀 머리칼의 소년과 개구쟁이 같이 선해 보이는 갈색 머리칼의 소년이 함께 어깨동무를 한 채 찍은 사진이었다. 생채기가 희게 그어진 사진은 색이 바랜 채 영영 어린 시절에 머물렀다.

그는 어린 자신을 손으로 쓸었다. 얼핏 울상을 지은 것처럼 보였다. 낡은 사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웃고 있었고 그 시절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만이 유일한 수확이었다. 히카르도는 사진을 돌려놓는 대신에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를 무어라 지칭하면 좋을까. 박사님 아니면 닥터? 입이 까끌거린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죄어 온다. 까미유, 까미유라고 불러. 누군가 그리 종용해오는 듯했다. 소리 내어 불러본다. 까미유.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기질의 단어. 어설프게 엮어낸 이름은 비행하지 못한 채 추락했다.

 

처음은, 그 자체로 특별했다. 히카르도는 까미유의 의자에 앉아 등을 젖힌 채 한없이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낮은 한숨을 쉬며 들어오던 까미유는 굳은 듯 멈춰 섰다. 그의 기척을 느낀 히카르도는 말없이 사진을 들어 올렸다. 까미유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내 물건에 손대는 버릇도 생겼나?”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답지 않게 격양된 어조다. 히카르도는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날 만든 거지?”

 

질문할 권리를 준 기억은 없는데.”

 

그는 빈정거리며 사진을 낚아챘다. 놓칠세라 꽉 움켜진 사진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일그러졌다.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까미유가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불편한 침묵이 노을 속에서 타들어간다. 까미유는 화를 눌러 참으며 손가락으로 문 밖을 가리켰다.

 

나가.”

 

히카르도가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까미유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겨진 사진을 펼쳤다. 히카르도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어스름에 잠겨가는 사이에도 그의 얼굴만은 선명하다.

어째서, 라고 묻는다면 그는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하고자하는 목적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것에 히카르도가 휘말렸고 그의 마음을 기꺼이 이용했다. 나쁘지 않아. 그렇게 수없이 되뇌었다.

그는 참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자신을 증오한다고 말했으면서 결국은 제 몸 바쳐 구해주었고 거짓 눈물과 사과에 다시 마음을 내어 주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는 자신을 증오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단순히 구실이 필요했을 뿐.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도, 자신도. 누구보다 넓은 세계를 보고 있다고 자만했으나 사실은 우물 속 개구리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를 자신의 손으로 묻었다. 고통으로 떠진 눈을 감겨주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졌다.

왜 뒤돌아서면 네가 있을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지금도 그가 서 있을 것만 같았다. 천국으로 떠나지 못한 그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것처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을 모를 때가 있어. 밤은 깊어가고, 산 자는 죽은 자보다 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처음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그를 만들어 낸 것은 참회를 위함이 아니다.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를 대신할 것을 위하여. 잔을 마주치며 건배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야. 서로를 이용하기만 했던 그 순간으로. 그렇게 사는 법 밖에 알지 못해.

 

히카르도.”

 

목소리가 부드럽다. 미소가 만연하지만 히카르도 눈에 그것은 불투명하게만 보였다.

 

이리와.”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손짓과 함께 그의 옆에 앉았다. 히카르도는 처음으로 낯설다라는 것을 알았다. 불협화음처럼 삐걱거리는 관계가 불안정하다.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것처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풍경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것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다정한 풍경은 어딘가 불합리했다. 적어도 히카르도는 그렇게 느꼈다. 까미유는 그를 옆에 앉힌 채 다정한 목소리로 옛 추억을 꺼냈다. 그것은 적어도 지금의 히카르도에게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히카르도는 이 순간을 영원히 가질 수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불합리했다.

 

히카르도, 날 봐.”

 

고개만 주억거리는 히카르도를 보다 못한 까미유는 그의 턱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돌려 세웠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잖아.”

 

예전? 그에게 과거라고 해봤자 차가운 철제 침대에서 눈을 뜬 것과 히카르도 바레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 그리고 죽은 자와 똑같은 외형을 가졌다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추억이라고 할 것도 없다. 까미유는 최근까지 자신을 방치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었다. 갑작스런 태세 전환과 오만한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치자 뱀의 먹이가 된 것 마냥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히카르도는 그를 밀어냈다.

 

나는 히카르도 바레타가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에 까미유는 웃음을 터트렸다. 일견 재미있는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천진난만하다. 그는 웃음을 지우곤 그의 뺨을 잡아 세웠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넌 히카르도 바레타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래. 만들었겠지.”

 

지하에는 대규모 연구 시설이 있다. 그곳에서 눈을 뜨고도 며칠간을 방치 당했다. 히카르도는 혼자서 걷고 말하는 법을 익혔다. 누구도 그의 행동을 제한하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철제 침대에서 연구실 여기저기서 모은 파일을 읽었다. 그것은 비단 이번 실험만 기록된 것은 아니었다. 일지에 가까운 기록은 뒤로 갈수록 후회와 한탄에 가려져 있었다.

 

사방이 적이다. 작은 약점이라도 들킨다면 그것은 곪아 터져 끝내 파멸할 것이다. 그를 집어 삼키고 싶어 하는 괴물은 많았다. 모두가 괴물이 되기를 원했다. 괴물을 집어 삼켜 더 큰 괴물이, 그렇게 삼키고 삼켜서 결국에는 자신의 몸까지 먹어치울 것처럼. 그는 약점이었을까, 적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까미유 데샹에게 히카르도 바레타란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앞에서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히카르도는 일지에 묻어난 처절한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절망적인 심정을, 그를 죽이고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 몇 번이고 한 헛짓거리도, 결국 땅 속에 묻힌 그를 바라보는 까미유의 시선도. 그리하여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을 만들어내 히카르도를 투영시키는 그의 생각도 알지 못했다.

 

히카르도. 말해줘. 전처럼.”

 

다시 날 사랑한다고. 네가 어느 날 밤 내게 찾아와 속삭였던 것처럼. 내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간절하게 말했던 그 날처럼. 그의 목소리는 울음 속에 잠겨 있었다. 차디찬 손을 잡아도 그 날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을 터다. 말해. 솜사탕처럼 혀에 감기던 문장은 명령조로 바뀌었다. 어서, 빨리. 말하라고.

 

네가 쓴 일지를 봤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토록 갈구하는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는지. 어째서 살려내지 못해 안달인지. 차는 식은 지 오래였다. 낮게 드리운 그림자가 해를 보려 고개를 내민 풀들을 짓밟았다. 동경해왔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까미유는 차를 카펫 위에 부었다. 코를 찌를 정도로 강한 향이 카펫을 진하게 물들였다. 이제까지의 평온을 전부 내버리는 것처럼.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그것이 목을 졸라맸다고, 정작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고 변명해도 이제는 믿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인형을 앞에 두고 티타임을 가져 무슨 소용일까. 정작 그의 껍데기는 찻물처럼 식어버렸는데. 히카르도가 입을 열려는 순간 까미유가 격양된 어조로 소리쳤다.

 

시끄러워, 불량품.”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 역시 마찬가지지.”

 

잔은 텅 비었다. 쏟아버린 찻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죽은 자는 되돌아오지 않고 깨진 그들의 관계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까미유는 마지막 날의 히카르도를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자신에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었다. 시간은 돌릴 수 없어. 대용품이 필요했던 거잖아. 그것이 날 사랑해준다면 그걸로 족했던 거잖아. 히카르도는 필요 없어.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아니, 아니야. 사실은.

불꽃이 이는 하늘을 등진 채 익숙한 길을 걷는다. 너무 자주 찾아간 나머지 눈을 감고서라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히카르도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조촐한 공동묘지는 띄엄띄엄한 간격으로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똑같은 크기의 십자가, 일정한 간격. 어딜 봐도 밋밋한 회색빛이 별이 흐르는 하늘을 담았다. 까미유는 누군가의 묘비 앞에 멈춰 서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흔한 유언도, 누군가의 헌사도 없었다. 까미유는 길고 긴 그림자를 느꼈다. 히카르도는 멀거니 서 자신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까미유는 히카르도를 돌려세우며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너는 마치 시체 같아. 차가워. 히카르도. 말해줘. 날 사랑한다고.

 

난 그러한 감정을 알지 못한다.”

 

그래. 그렇겠지. 까미유는 쓰게 웃었다. 히카르도는 이어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가지만을 품고 갔으니, 그것은 내가 가질 수 없어.”

 

별이 쏟아진다. 기약 없는 내일이 찾아왔다. 올려다본 하늘은 무너질 것처럼 무섭도록 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별의 눈물을 바라보며 까미유는 조용히 입을 달싹였다. 꽃다발 대신 이승에서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