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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독시 / 중혁독자] 구원
2019. 1. 29. 03:40 - Elysee

 

 

*355화 이후 스포

 

 

 

 

 

정립되지 않은 문장은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떠난 자리에 못박힌 듯 떠나지 못했다. 누구보다 유중혁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김독자는 이 순간부터 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아졌다. 몸의 떨림이 그대로 회중시계에 전해진다. 그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 김독자는 자기 자신을 미워해야한다. 그가 겪은 배신감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자신을 헤집어야했다. 실은 그가 용서해줄거라는 안일한 꿈을 꾸었다. 며칠쯤 투명인간 취급을 할 수도 있겠지. 화내며 무시하거나 죽인다며 쫓아올지도 모른다. 그 정도라면 괜찮았다. 자신이 생각한 범위 내였다. 아니, 어쩌면 유중혁이 진심으로 화내며 죽인다고 검을 맞대는 게 나을 지도 몰랐다. 그것도 김독자가 유중혁을 아는 범위 내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아무 말도 없이 떠났다. 아직까지 가지고 있을거라 생각지도 못한 회중시계를 곱게 둔 채로.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새벽녘의 바람은 여전히 차게 불어오는데, 그것보다 냉정하고 차갑던 남자는 서릿발을 지닌 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유중혁이 자신을 동료로 여기고 있었음을 김독자는 알아차렸다. 어째서 인간은 익숙한 것이 떠나고서야 그 의미를 깨닫는 걸까. 김독자는 얇은 손가락으로 회중시계를 매만졌다. 선명하게 새겨진 각인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수많은 전투를 겪었음에도 회중시계는 망가진 부분이 없었다. 본인은 그렇게 다쳤음에도. 김독자는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가까스로 삼켰다. 아니, 사실은 범람한 감정에 파묻혀 죽을 것만 같았다. 갈피를 잡지 못한 시선은 여전히 침대에 붙잡혔다.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안일한 생각이다. 유중혁은 자신의 감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오히려 행동으로 보여주는 일이 빈번하다.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만한 것이다. 시침 소리가 정적 속을 헤맨다. 김독자는 막연하게 그와 진심으로 싸우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적이 되어 서로를 죽일 듯이 몰아붙이는 날이. 오로지 그를 위한 것이라 믿었던 일들이 부메랑이 되어 유중혁을 찔렀다. ? 어째서? 그러나 대답해 줄 이는 침묵만을 남긴 채 떠났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소설에는 주인공이 있고, 그와 대립하는 악역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 중혁아. 이건 너만을 위한 이야기야. 김독자는 몸을 돌렸다. 이야기의 끝에 너와 내가 바라는 결말이 다르다면 반드시 누군가는 악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유중혁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뿐이다. 김독자는 서글프게 웃었다. 함께 마지막을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허울 좋은 꿈이었나보다. 그는 방을 나섰다. 늘어진 그림자가 소리 없이 닫혔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진 않았다. 김독자는 계속해서 동료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이끌어 나갔다. 유중혁이 떠난 것이 그에게 아무런 결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약속한 듯 입을 다물었다. 내심 그의 속이 끓고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멸살법의 존재를 밝힌 이후로 김독자 컴퍼니가 가진 김독자에 대한 신뢰는 대폭 상승했다. 그가 기상천외한 일을 벌이더라도 그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라는 이유만으로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김독자가 무슨 일을 하든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자신을 떠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때로 김독자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듯 했으나 그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진행해나갔다. 유중혁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김독자는 본래부터 속내를 밝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제아무리 오랜시간을 함께한 동료일지라도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멸살법 사건이 있고 난 이후에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김독자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무한정 넘어오는 신뢰의 맛이 까끌했다. 덕분에 김독자는 자신의 계획을 천천히 진행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모두를 배신하게 되는구나.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때론 그런 생각을 했다. 유중혁이 말없이 자신을 떠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줬더라면 바뀌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따금 원망도 했다. 그게 뭐가 어려워서. 한 번 들어주기라도 하면 어디가 덧나냐고. 하지만 아직 유중혁이 겪지 못한 미래의 유중혁까지 알고 있는 감독자로써는 그런 알량한 말로 자신을 설득하기엔 무리였다. 결국엔 유중혁이 떠난 건 당연하다는 결과로 귀결되곤 했다. 납득했기에 이런 계획을 짜버린거겠지. 자신이 떠나더라도 남은 동료들은 유중혁이 잘 챙겨줄 것이다. 모든 건 그를 위함이었다. 그러니 김독자가 사라져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정말로? 상념이 머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는 답하지 않았다.

 

 

 

드넓은 창공이 빛났다. 이질적인 빛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시나리오의 끝, 갈림길의 종착점에서 유중혁은 우뚝 멈춰 섰다. 빛무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 시야 너머로 누군가가 있었다. 적인가? 손에 쥔 흑천마도의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유중혁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대가 다가오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운 느낌이었다. 희미해진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어느 새벽의 공기 속에서 원망을 토해내기도 했던 것 같다. 무뎌졌다고 생각한 감정의 둑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치고 올라오는 감정들은 입 속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것을 무어라 정의해야할지 몰라서 유중혁은 끝없기 걷기만 했다.

 

중혁아.”

 

실체 없는 상념이 말을 걸었다. 유중혁은 멈춰 섰다. 상대는 검은 날개를 펼친 채 까마득한 상공을 떠다닌다. 아주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김독자.”

 

상대는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웃었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의 모습은 변한 곳이 없었다. 머리에 솟은 뿔이 장난스럽게 까딱인다. 갈림길의 끝에, 구원의 마왕이 존재했다. 이곳은 시나리오의 종착점. 마지막 시나리오였다. 먼저 와 있었나.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멸살법을 아는 유일한 독자였으니까. 유중혁은 검을 쥔 손을 늘어트렸다. 얼핏 경계를 푼 듯 보였으나 그는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슨 짓이지.”

 

그 날 이후로 유중혁은 단 한 번도 김독자 컴퍼니와 접점을 가지지 않았다. 새로운 세력을 만들지도 않았고 동료를 두지도 않았다. 필요하다면 이용했고 이후에는 가차 없이 버렸다. 그러나 불가항력이 그의 길을 가로막을 때, 알 수 없는 힘이 등을 떠밀었다. 방황하는 그의 손을 붙잡아 이끌고 정답을 속삭였다. 미지의 예언이 그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유중혁은 그것이 불쾌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자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눈을 감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어리광이라고 해도 좋았다. 단순히 그런 말로 치부할 수만 있다면.

김독자의 행보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왔다. 그는 김독자 컴퍼니를 해체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시나리오 클리어도 그만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신이기를 그만뒀다. 김독자는, 구원의 마왕은 누구보다 충실한 성좌가 되었다. 생명과 죽음을 유희거리로 알며, 그들의 발버둥에 기꺼이 코인을 투자하는. 방관자이며 때로는 시나리오를 망치는 광대로. 그의 행적이 스타스트림에서 이슈가 되는 이유는 그가 이 세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유일한 독자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원하지 않아도 그의 발치에는 코인이 쌓였고, 그에게서 예언 한 조각이라도 듣고 싶어 하는 성좌들은 차고 넘쳤다. 그토록 기고만장하던 거대 성운들도 그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고 화신이었을 적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변모했다. 이것이 유중혁이 알고 있는 구원의 마왕에 대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클리어 할 때마다 그가 방해할 것이라 여겼다. 물론 그런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기준에 의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유중혁이 하고자 하는 일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마치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존재의 편애를 받는 건 생각 외로 기분 더러운 일이었다. 그게 특히 구원의 마왕이라면.

 

중혁아. 이야기는 즐거웠어?”

 

구원의 마왕은 스타스트림에 남은 마지막 성좌였다. 유중혁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흑천마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검 끝이 서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반복된 회귀와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순간이 왔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없었다. 언젠가 모든 것은 종막을 향해 치닫는다. 유중혁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마감할 수 있는, 마지막 등장인물이었다.

회포 풀 시간도 안 주네. 서운하게. 구원의 마왕은 투덜거렸다. 흔들리지 않는 검이 구원의 마왕의 심장을 향했다. 중혁아, 그거 아냐? 내가 진짜로 성좌가 되니까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부러졌어. 그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소리는 끝이 없었다. 유중혁은 구원의 마왕을 보며 물었다. 김독자, 이게 네가 원하던 결말인가? 거짓말처럼 그의 수다가 멈췄다. 그는 몇 번인가 입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본인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빙그레 웃었다. . 맞아. 그러니까 물어보잖아. 중혁아, 이야기는 즐거웠어? 유중혁이 답했다. 아니. 그렇구나.

하하, 구원의 마왕은 소리내어 웃었다. 한꺼풀 가면이 덧씌워진 것처럼 말간 얼굴에 금방이라도 금이 갈 것 같았다. 유중혁. 모든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있어 그렇지? 그럼 주인공이 있으면 물리쳐야할 악역도 있을 거 아냐. 유중혁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 구원의 마왕은, 김독자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 함께 이야기를 끝내자.

 

 

 

  *

 

엄청난 날조...